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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투쟁의 외길을 살아간 이회영[일제 강점기 그들의 다른선택]

안다미로72 2017. 10. 25. 23:52

6학년 아들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책한권을 빌렸다/

어린이,청소년 역사관련 -일제 강점기 그들의 다른선택<저자 서안나>

항일투쟁을 벌인 항일투사 와 친일파의 이야기이다.

명문가의 이회영 / 망국을 이용하여 거부가 된 투기꾼 김갑순의 이야기를 올려봅니다.


독립신문에 실린 사서을 읽고 이회영이 '소년 30세 시'를 쓴다.

(1896년 4월7일 서재필에 의해 창간된 독립신문)

세상에 풍운은 많이일고

해와 달은 급하게 사람을 몰아붙이는데

이 한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할것인가

어느새 벌써 서른살이 되었으니

 

'한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 할것인가'라는 시글처럼

청년 이회영은 1895년 을미 사변이후의 시대적 상황속에서

과연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할지 스스로에게 물었던 절실한 물음이었다.

 

백사 이항복의 후손인 이회영

만국평화회의에 (1906년 6월 44개국이 참가하여 열렸던 국제회의) 고종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불합리함을 알리려 노력했으나 실패하였다.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준열사는 죽음으로 항거햇따.

그후 이회영은 독립운동 결사체'신민회'를 탄생시켜 1백개에 가까운 학교를세우며 망해가는 나라에 새기운을 불어넣기에 안간힘을 썼다.

1910년 이후 이회영은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독립군을 기르는 일을 합니다.

6형제가 일제의 눈치를 피해 집과 땅을 싸게 처분하고 조선을 떠나게 됩니다.

이회영 일가가 망명당시 40만원(요즘시세 600억원 훨씬 넘는 자금)이 넘는 거금은 일년도 안되서 동이나고 말았다.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에도 이회영 일가는 신흥무관학교를  통해 독립투사를 길러내게 됩니다(약 3500명)

이들은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주역들이 되었습니다.

베이징으로간 이회영은 굶기를밥 먹듯이 하는 생활속에서도 아나키스트운동을 전개했다

(아나키스트 운동 : 사람을 지배하는 모든 조직과 권력을 거부하고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 정의 ,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운동)

곤고한 삶 속에서도 이회영의 항일 투쟁의 의지는 더욱 빛났다.

이회영은 어느덧 환갑을 넘어섰다.

'내가 투쟁할수 있는 시간도 이제 얼마남지 않았다. 마직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이회영은 '어디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리고 마지막 투쟝의 자리로 만주를 선택한다.

하지만 당시의 만주는 일제가 통치하는 곳이어서 매우 위험한 지역이었다.

가족과 동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회영은 만주로 떠나게 된다.

1932년 11월초 만주로 떠난 이회영, 그런데 11월 17일 뤼순 감옥에서 사망을 알리는 전보가 날아왔다.

간수는 이회영이 자살을 했다고 말했지만 피로 얼룩진 이회영의 시신은 모진 고문의 흔적이 역력했다.

경찰은 당장 화장을 하라고 도촉하는  바람에 이회영은 11월 28일 뼛가루가 되어 고국에 돌아와 묻혔다.

전 재산과  생애를 바쳐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우다 모진 고문을 당해 순국한 이회영

그이 다섯형제들과 가솔들도 어렵게 살다 해방되기전 숨졌다고 한다. (이시영은 돌아옴)

하지만 가솔들이 겪어야 했을 고난과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위기에 빠진 나라를  살리기 위해 헌신한 이회영

독립을 향한 끝없는 항일투쟁의 외길을 살아간 이회영

가슴이 먹먹해 온다.

일제 강점기 그들의 다른선택-선안나-

 

 

어떤 젊음 우당 이회영 일가]

EBS 역사채널e '신흥무관학교'

 

초등고학년이나 중학생이 있다면 한번은 읽어보면 좋을 역사책입니다.

일제 강점기 그들의 다른선택